정지현이 그리는 구체적 노동자의 보편성에 대하여

이윤희(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

정지현이 검은 목탄으로 그리는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구석인지 눈길을 끌어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그의 그림 속에 나오는, 안전모를 쓰고 나무 위에 올라가 작업을 하고 예초기나 농약살포기 같은 것을 등에 지고 들판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별달리 아름답지도 않고 신기할 것도 없으며 무슨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도 않다. 그런데도 눈길이 그의 그림에 계속 머무른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일하는 사람들이 그럴 수 없이 평범하지만 이상하게도 낯선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낯선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상적인 노동이 미술의 중요한 소재가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일하는 모습은 지극하 평범하고 보는 사람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도 없기 때문에, 과거에는 미술작품의 소재로 대접받지 못했다. 일하는 모습을 소재로 하더라도 중요한 인물이 중요한 일을 하는 모습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왕과 귀족, 그리고 종교가 주도권을 잡았던 시대를 지나, 시민의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노동이라는 소재는 미술의 (전면에? 아니) 한 귀퉁이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무수히 복제되어 이발소 그림처럼 눈에 익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의 <만종>(1857~1859)이나 <이삭줍기>(1857)는 19세기에 농민화의 전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을 하다가 잠시 손을 놓고 기도를 하거나 추수가 끝난 스산한 들판에서 곡식 낟알을 줍는 밀레의 그림 속 인물들은, 그 고달픈 모습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시적인 감흥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게다가 계절을 느끼게 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일하는 인간들이 조화를 이루어, (밀레의 실제적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와는 별개로) 낭만주의적 반응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사실주의를 표방한 귀스타브 쿠르베(Gustav Courbet)의 <돌깨는 사람들>(1849) 역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재로 하고 있다. 가장 낮은 계층이 종사했다는 돌 깨는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은 두 명의 남자들로, 그들의 허름한 입성이 신분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찢어진 셔츠와 조끼, 헐어버린 바짓단은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요소인 것이다. 사실주의를 선언하고 표방했지만 늘 낭만적인 바탕을 숨기지 못해왔던 쿠르베의 특성을 생각하면, <돌깨는 사람들>에서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그림 속 대상들에 대한 모종의 연민 같은 것이 저변에 깔린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일하는 사람들을 소재로 한 그림들은 우리나라 서양화 도입기에도 많이 그려졌다. 마르고 황폐한 대지에 맨발의 소녀가 동생을 업고 곡식 낱알을 줍는 모습을 묘사한 이영일의 <농촌아이>(1929)나 발그레한 얼굴로 소를 몰고 가는 소년을 그린 장우성의 <귀목>(1935)은, 가난한 식민지의 일상을 그린 것이기는 하나 어딘지 모르게 농촌의 순박함과 정취를 강조하는 느낌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해방 이후 패배주의적 향토색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에도 우리나라 미술감상의 한 켠을 점유하고 있다. 
노동이라는 인간의 활동을 애잔하게 감상적으로 그려내는 이러한 작품들을 바라보는 방식은 아마도 관객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어떤 관객들에게는 몸을 쓰는 인간의 노동이 진기하고 흥미진진한 소재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들은 감상자가 그림 속 인물들과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기 때문에 허름한 옷을 입고 하루하루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움직이는 농민이나 노동자들의 삶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치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거나 혹은 궁핍했던 과거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는 대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인간의 노동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그것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려진 상대를 멀찌감치 대상화하여 얻어지는 낭만주의적 감상과 관계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보아왔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정지현의 작품 앞에서는 익숙한 감성이 작동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소박하게 하루치의 노동을 하는 순진한 사람들을 그린 그림일 것이라고 여기고 바라보면 이러한 낯선 느낌은 더욱 증폭된다. 그의 그림 속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구체적인 일에 몰두해 있다. 멀리 있는 과일을 만져보기 위해 몸을 숙이거나 예초기를 돌려 풀을 베는 것처럼 노동의 과정 중에서 행해지는 구체적인 하나의 동작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 속 인물들은 도시인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농민의 모습, 즉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서의 특성을 보인다. 과실이 익을 정도를 측정하느라 잠깐 멈춘 손길에서는 세심함이 느껴지고, 높은 나무 위에서 도구를 들고도 엉거주춤하지 않는 자세가 믿음직스럽게 보인다. 이러한 인물들을 바라보며 애잔한 낭만주의적 감상에 젖을 일은 애초부터 없다는 듯이 말이다. 
노동을 소재로 한 지난 시대의 그림들이, 미의 반대편에 있는 추를 극대화하여 감성을 자극하거나, 혹은 한 프레임 안에 미적인 것와 그렇지 않은 것들을 병치함으로써 아이러니한 낭만성을 이끌어냈던 것과 달리, 정지현의 노동자상은 과장된 요소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에 신성한 가치를 부여하여 역사를 초월하는 노동자상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림 속 인물들은 대단히 구체적인 초상들이며 일을 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전형성을 띠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그림들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지도 않다. 이렇게 그림 속 인물들이 오직 생생한 현실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메시지와도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정지현이 그려내는 노동 소재 그림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별다른 사건이나 서사가 개입되어 있지도 않은, 평범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정지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이번 작품들에 대해 쓴 글의 첫 문장은 “고대 그리스어로  노동을 의미하는 ‘ponos’는 슬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labour’는 영어에서 14세기에 등장했는데 ‘짐을 메고 미끄러지거나 비틀거린다’는 의미였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어서 그는 노동 가운데서도 도시인들의 노동이 아니라 전근대적인 농촌의 노동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 농민들의 노동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는 혼자 일하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인데 그것은 실제로 농촌에서의 일이 혼자서 일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점 등을 이야기한다. 글의 마지막에는 다시 노동의 어원으로 돌아가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가 왜 ‘슬픔’을 뜻하는 것일까?”하고 자문하면서 그 이유를 “한 해 열심히 노력해도 예상치 못한 일들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때”의 경우를 들어 설명한다. 농사일이라는 것이 일한 만큼 반드시 응분의 보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슬픔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그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여 일하는 장면을 그려냈지만 궁극적으로는 슬픔의 감정에 맞닿아 있다. 그는 그 슬픔의 감정을 ‘숙명’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들은 농촌의 노동자 뿐 아니라 도시의 노동자, 주부, 혹은 반복되는 삶을 영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 깊이 눌러놓고 있는 어떤 감정과 관계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이 보는 이들에게 전파하는 ‘숙명’의 ‘슬픔’은 쉽게 전달되어 오는 낭만주의적 향수나 상투적 연민이 아니다. 그림 속 구체적인 인물들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지만 실제 지금의 현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얼굴이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나 혹은 나 자신의 얼굴과도 닮아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지현의 그림 속에서 일하는 구체적인 인물들은 전형성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또한 그 구체적 보편성은,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자신을 포함한 땅에 발을 딛고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각자의 ‘짐을 메고 미끄러지거나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깨달음에 이를 때 얻어진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