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정(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원통형 미끄럼틀의 터질 듯한 양감. 정지현 작가의 <play ground>(2021)를 보았을 때 떠올린 첫 문장이다. 2021년 상업화랑에서의 개인전《one way》에서 우연히 작가의 작품을 보았고 <play ground>시리즈를 마주했다. 목탄으로 촘촘히 쌓아 올렸음에도 안개가 낀 듯 아득한 화면 안에는 놀이터와 사격장, 목욕탕, 밤의 길거리 등이 펼쳐져 있었다. 지극히 평범하기에 서늘했던 장면들. 그것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 작품들에 대한 감상이었고 꽤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이후 보게 된 그의 포트폴리오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다. 초기와 최근 작품 속에 등장했던 요소들이 지속적으로 교차되고 있던 것이다. 과거에는 인물이든, 비인간 동물이든 확인 가능한 형태들로 화면을 구성하고 서사를 이었다면(<무명의 사건들>시리즈(2017)) 이후 그들은 뒷모습으로 등장하거나 화면에서 멀어지거나 흐릿해진다. 혹은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그들의 신체를 묻어버리기도 한다.(<그 사람들>시리즈(2018), <영역침범>시리즈)
대상을 대하는 방식은 조금씩 변하지만, 앞서 언급한 <play ground> 시리즈의 경우 제목 그대로 놀이터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의 면모를 파고든다. 화면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미끄럼틀의 반들거리는 표면이 눈을 사로잡는다. 또아리를 튼 그것은 화면의 오른쪽(밖)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 빛의 위치가 명확하진 않기에 낮 밤을 뚜렷하게 구분하긴 어렵지만 작가는 밤의 풍경이라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미끄럼틀을 향해 쏘아진 빛은 아마도 가로등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테다. 그 빛 아래서 유난히 돋보이는 미끈한 ‘덩어리’는 배수관 등 어둠 속에서만 자리해야 하는 사물들을 닮아있다. 빛이 없어야 할 시간 안에서 미끄럼틀은, 천진한 놀이기구로서의 이름을 지워낸다. 같은 제목의 다른 작품에서는 오리 모양의 목마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보는 이의 기준으로 빛이 오른쪽에서 강하게 내리쬐기에 그늘진 오리의 입꼬리에는 인위적인 미소가 두드러져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게 천둥벌거숭이들의 주체되지 않는 욕구를 받아내는 장소에 그늘이 드리워질 때 장난감 총, 동상, 풍선, 마네킹 등 무심하게 배치되었던 유희적인 표상들은 조악하고 폭력적인 단면을 드러낸다.
대상이 가진 기호와 그를 둘러싼 체계의 빈약함을 들추는 시도는 2017년의 <새벽의 축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묵직한 부피를 뽐내며 빠르게 회전하는 원형의 놀이기구는 멈추지 못하는(않는) 쾌락의 굴레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play ground>처럼 하나의 대상을 놓고 의심을 가중하는 방법을 택하는 대신, 놀이기구를 조작하는 이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작은 관리소를 화면에 같이 담았다. 거대한 기구 옆에 있는 이 남루한 건물은 찰나이기에 허무한 욕망을 지탱하고 실현해 줄 누군가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들의 부재로는 이루어질 수 없음에도 사회는 그들을 살피기는커녕 가로막거나 외면하기에 급급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자연, 삶, 그리고 몰이해와 싸우는 농민들의 삶을 그린 <불편한 기술>(2016), 도시의 구석에서 발견하는 <구토>, <낮잠>(2020)등의 인물들과도 연결되는데, 주로 사회와 불협화음을 이루는 대상으로 치부되는 존재들이다. 육중한 놀이기구에 가려진 너절한 가건물처럼 말이다.
정리하자면 그의 작품에서 주를 이루는 건 인물과 자연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풍경에서 포착된 갈등과 대립이다. 여기에는 작가 개인이 처한 상황도 포함될 테며 ‘자연’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렇게 견고히 구축된 혹은 그렇다고 믿은 대상들에게서 발견된 균탁(龜坼)이 작가의 손을 움직인다. “풍경과 사람 그 속에 숨겨진 코드들”이라는 작가노트의 첫 문구는 작품이 향하는 궤도를 충분히 암시한다. 그리고 목탄은 이 맥락에서 아주 적절한 재료인데, 초기 작품에서 면밀한 묘사가 주였다면 최근작 중 일부는 마치 검은 화면에서 대상을 찾아 건져 올리는 듯 보이기도 한다. 습기에 찬 눅눅한 공기를 얹어 수상한 정경을 만들거나(<습한 곳>, 2021) 수풀과 하나 되어 위장하는 대상의 모습(<위장술>, 2023)은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스치며 선과 면을 쌓는 목탄과 작가의 태도를 닮아 있다.
신작 <영역침범>시리즈를 살펴보자. 지난 <영역침범>은 작가 자신이 등장(<영역침범>(2022), <코털 자르기>(2019))하여 서사를 유추하게 한다. 그런데 2023년 같은 제목의 시리즈에는 인물 대신 잡초와 비인간 동물(고라니)이 나타난다. 즉 연약한 개체들을 대신해 작가는 자신이 인지한 세상의 모순과 어불성설의 사건들에 대해 말하기를 결심한 듯 보인다. 잡초를 그린 <유령들>(2022)은 작가의 작품 중에는 드물게‘색’을 보유한다. 물론 그마저도 탁하게 보이지만, ‘그렇게라도’ 그들은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알린다. 아슬아슬하게 콘크리트 벽과 바닥을 비집고 뿌리를 내린 그들을 통해 <영역침범>이라는 제목을 헤아릴 때, 영역을 침범당한 주체가 누구인지 쉬이 결정 내리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작가가 주목하는 지점은 명확하다. 까슬한 수풀 안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고라니의 불안한 눈빛(<위장술2>, 2023)과 엉켜있지만 단단한 몸체(<위장술3>, 2023)를 흩날리는 잡초의 선은 그가 누구의 입장에 서 있는지를 말해준다.
작가는 마르틴 바른케Martin Warnke의 『정치적 풍경Politische Landschaft: Zur Kunstgeschichte der Natur』(1992)을 추천해주었다. 책 표지에는 ‘풍경화에 감추어진 정치적 의도를 드러낸다.’고 적혀있다. 작가노트의 문구와 유사한 맥락이다. 작가가 고른 장면과 거기서 탄생한 회화는 특정한 목적과 의도가 있기에 정치적이라 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작품에 정치적이라는 단어를 성급히 붙이는 대신‘감추어진’에 더 방점을 찍고 싶다. 내게 있어 그의 작품은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꼭꼭 숨겨둔 막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요한 명화들을 정치사의 맥락에 위치시키려는 이 책의 논지를 뒤로하고 내가 기억하는 구절은 성채(城砦)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 파트는 ‘성채를 올려다보는 눈길과 내려다보는 눈길은 대응되었다’는 문구로 시작한다. 나는 성채를 올려다보는 눈길에 상처 입은 유약하고 작은 상대들을 관찰하는 작가를 대입해 본다. 굳건한 성채 아래 잡초가, 고라니가, 그리고 가려진 존재들이 처한 서사가 있음을 알리는 그의 작은 목소리를 상상한다.
작가는 곧 있을 개인전을 준비하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여러 작품 중에서도 <말을 걸러주는 장치>에 이상하게 눈이 갔다. 거기에는 귀가 그려져 있었다. 자연스레 ‘장치’가 귀라고 판단했으나 실상 이 그림의 주인공은 귓구멍을 ‘침범’한 털 몇 가닥이었다. 결국 나는 보편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표상에 가려진 이들을, 그 역할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을 드러내려는 결심을 작품으로 옮기는 작가의 복잡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감히 가늠해 본다. 검은 심연의 시간 아래서, 그의 작품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스산하게 다가와 말할 준비를 한다. 내게 작가의 그림은 그런 그림이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