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 사물과 사건이 발화하는 중첩기억의 서사

조지현 (우민아트센터 학예팀장)                                                                                                     
정지현의 최근 시리즈인 <무명의 사건들>의 ‘무명’은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둔 의미일까. 사전적 의미로 이름이 없거나 알 수 없음이란 의미에서의 ‘무명’(無名)일까, 아님 잘못된 의견에 집착하여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의 ‘무명’(無明)일까. 실상 전자의 의미에 가까워 보이긴 하지만, 상실된 기억의 파편을 대상과 풍경을 통해 찾아 헤매고 있는 작가 내면의 집착적 심리상태로 해석해 본다면 후자의 의미로 본다고 해도 얼추 적절하다 싶다.
작가는 당장이라도 버려질 것 같은 상태로 변질된 브로콜리, 벌집, 말라비틀어진 토마토 등을 확대시켜 묘사해 현미경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을 사물의 면면에 깃든 시간의 흔적을 그려왔다. 인생의 덧없음을 암시하는 17세기 정물화 ‘바니타스’를 연상시키는 작업을 이어오던 그의 시선은 이제 사물과 풍경이 발화하는 상실된 기억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또한 시각적 대리물로 치환된 상실된 기억은 그의 화면에서 풍경의 형태로 존재하며 대상이 가진 중첩된 의미의 결을 드러낸다.
사건의 내러티브를 절삭한 데자뷰적 풍경
작가는 <축제>에서 어두운 밤 수성 못 축제를 준비하는 어머니 부대의 연습장면을 포착한다. 행사 참여를 위한 율동연습을 하기에 언뜻 걸맞지 않은 시간과 장소라는 것 이외엔 별스러울 것 없는 장면이지만, 시니컬하고도 장난기 가득한 시선으로 내러티브를 소거한 채 관찰되어진 행위는 퍽 의뭉스럽고 비밀스러워 보인다. 작가는 이처럼 관찰자적 시점에서, 풍경에서 인물을 떼어놓고, 서사적 맥락에서 행위를 탈각시켜 대상이 지니는 기억의 알레고리를 차용해 상실된 기억의 풍경을 드러낸다.
<휴식>은 한적한 강가를 무심히 배회하고 있거나 강가에 누워있는 인물이 그려진 작업이다. 작품의 제목처럼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는 중일 수도 있지만 얼굴과 몸의 일부가 가려진 채 드러누운 인물은 시체처럼 보인다. 해당 인물 묘사의 모호성에 대한 물음에 어린시절 강가에 물놀이를 왔다가 빠져죽은 사람의 시신을 건져내는 장면이 겹쳐졌다고 하는 작가의 진술에 빗대어 볼 때, 그가 포착한 대상이 가진 다의성은 의도적이기 보다 무의식적 행위에 가까울 수 있으나 망각된 기억이 작가가 주목한 형상을 통해 드러났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작가는 이처럼 대상의 의미가 갖는 단선적 해석의 진부함을 기억의 알레고리를 통해 다의적으로 확장시키거나 무의식 어딘가에 자리잡은 특정기억과 교차시켜 데자뷰적 풍경을 만들어 낸다.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어둡고 낮게 깔린 우울함의 정서는 목탄과 콘테라는 건식재료를 가지고 무수한 중첩을 통해 조성하는 음습하고 불온한 대기로부터 전해진다. 특히 자연에 대한 작가의 멜랑콜리한 정서는 모든 생명들을 생성시키고 만물을 풍요롭게 포용할 것만 같은 자연의 어두운 이면을 발견하게 된 일련의 사건, 자연의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마주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작가가 2015년도부터 시작한 <녹색의 이미지> 연작을 진행하면서부터 머릿속의 부유하는 단어들이 숲, 물, 밤, 대기, 공포였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에게 각인된 자연은 단지 경험적 차원을 넘어 그의 삶,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공감각적 심상의 원천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사건에 관한 상실기억 편집 툴 
새로운 사고, 사건을 언론이 제공하는 이미지에 의존해 해석할 때 정작 그 사건의 실제와 상이하거나 사건이 지시하는 내용과는 무관할 때가 많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도 일상의 사건을 기억할 때 실제의 진위여부 보다는 자의적으로 과거를 편집하거나 왜곡시키곤 한다. 작가가 생경한 이미지를 포착하는 방식이나 대상의 형상을 통해 기억을 환기시키는 방식은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휴식>과 <재난>에서 배경으로 대체된 푸른색의 여백은 사건에 대한 상황에 대한 수사에서 중요기억의 파편을 떼어냄으로써 사건의 내러티브를 절삭하려는 시도와 함께 맞물려 추상성을 부여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배경에서 선택된 이미지를 떼어내려는 일련의 시도는 포토샵의 편집기능과도 유사한데 생생한 고통의 상황을 3차원적 장면이 아니라 납작한 2차원의 사진적 이미지로 가공한 후, 피하고 싶은 상황에 몰입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방어기제, 작가의 오래된 삶의 습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지현은 이처럼 일상적 사건에서 포착된 사물과 풍경, 혹은 이들의 생경한 조합이 발화하는 객관적 서술로는 한정되어 포용하지 못하는, 망각에 들러붙은 내밀한 비가시적 기억마저 소환하여 단선적 프레임으로 읽힐 수 없는 대상과 무관한 척 발뺌을 잘하는 풍경의 형상을 통해 낯선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에게 사건은 ‘사고’가 아닌 차라리 ‘일상의 이벤트’에 가깝다. 그가 수없이 지나치는 일상의 사건들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방식은 엄밀히 말해 대상으로 치환된 자신의 기억의 파편들을 수집하는 과정으로도 읽혀진다. 또한 그는 대상의 가시화된 표면적 의미 뿐 아니라 비가시적 의미의 결을 더듬으며 특유의 위트있는 착상을 통해 의외성을 드러내거나 의미의 외면을 확장시킨다.
작가는 <무명의 사건들>에서 축제 준비에 열중하는 아주머니 부대의 이상스러울 것 없는 율동 연습을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고 비밀스러운 제의 의식처럼 읽어내고, 동네 떠돌이 개를 화면 전면에 부각시켜 <명견>이라는 제목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작가는 별스러울 것 없는 상황을 ‘별 것’인 것으로 만들어 내면서 결과적으로 그게 일상 속에서 대단한 눈요깃거리가 아니거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더 ‘별 것’도 아닌 것처럼 기어이 만들어 버리고야 마는 유머러스한 태도를 발견한다. 또한 하루가 다르게 돌아가는 우리의 고단한 일상에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풍경이 가진 내연적 기억의 결들과, 시간에 의해 잊혀진 작지만 소중한 일상의 의미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한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세계의 Maker 혹은 Player
전작<녹색의 이미지>로부터 최근<무명의 사건들>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그가 화면에 포착한 사물과 사건의 풍경은 물리적, 선형적 시공간개념을 벗어나 존재하는 무색의 낯선 세계를 호출한다. 스산한 겨울 바람소리도,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의 무수한 녹색의 말들도 중지해버린 이 세계에서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니라 흔들린 채 멈춰 있고, 강물이 흐르는 게 아니라 흐르는 채 멈춰 있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세계에서 <the maker>라 스스로를 호명하고 오줌을 누는 행위를 통해 멈춰있는 수면의 파동을 일으키거나 숲속을 배회하듯 어슬렁거리며 잎새의 작은 흔들림을 만든다. 작가는 일상의 사건을 포착한 바로 그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감각을 포획하여 기억과 무의식의 파편과 대상이 충돌하여 만드는 낯선 세계의 전지적 창조주이면서 언제든<the maker>에서처럼 작은 몸짓으로도 멈춰진 세계를 구동시킬 수 있는 플레이어 일지 모른다. 전작 시리즈인 <녹색의 이미지>에서 최근<무명의 사건들>로의 이행은 그가 세계를 만들어 오던 익숙한 언어의 세계를 새롭게 조직하거나 재편하려는 적극적 시도로서 읽혀진다. 이는 더 나은 방향으로 세계로 도약하길 갈망하는 작가의 자연스러운 행보로 해석될 수 있으나 꼭 다른 세계로의 이행만이 답이 아니라 그 다운, 그만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언어로 만들어낸 기존의 세계 안에서도 충분히 확장될 수 있음을 스스로 확신하고, 지금의 <무명의 사건들>의 새로운 실험도 병행하여 머지않은 미래에 정지현이<the maker>로서 구축한 세계의 풍경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16